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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sther/[E] picture diary

2015.01.12 사진 찍을 때 하나둘셋을 말하기 싫은 이유



로즈와 가브리엘은 태어날 때부터 셔터 소리를 들었다.


배냇짓을 하고, 뒤집기를 하고, 걸음마를 하고, 첫 빨대컵을 쓰고...

뭔가 변화가 있기만 하면 카메라를 들었고

그 성장의 변화들은 고스란히 사진으로 남았다.


그냥 찍으면 되었다.

집중한 만큼 양질의 사진이 나와주었다.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반셔터를 배웠다.


아직 말귀도 못알아듣는 아기 로즈와 아기 가브리엘에게


"하나 둘 셋"이라는 신호는 무의미했다.







카메라를 조금 의식하기 시작한 유아기가 된 아이들은

처음 몇 컷은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거나 브이를 하며 촬영에 응해주었지만 

이내 찍거나 말거나 자신이 하던 놀이로 돌아갔다.


이따금 장난기가 발동해 해괴한 포즈를 취하거나 촬영을 방해하거나 해서

애초에 의도했던 촬영 컨셉이 안드로메다로 향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긴 했지만 ..


자기 할 일 그냥 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았다.

피사체의 행동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구도와 배치를 배우게 되었다.


"하나 둘 셋"을 말해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알아서 구성하면 되었다.







이제 아이들은 각자의 카메라를 하나씩 관리하는 나이가 되었다.


물 마시고, 밥 먹고, 책 읽고, 놀고, 세수하는 그런 일상 속에서

뷰 파인더 너머로 이름을 부르면

특별한 주문이 없는 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평온하게 촬영에 응해준다.


아이들은 카메라 앞에 있는 것이 어색하지도 않고

사진이 잘못 나올까봐 걱정하지도 않고

눈 감을까봐 노심초사 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이 솔깃해할만한 얘기를 꺼내 그 표정을 포착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그래서 "하나 둘 셋"을 하지 않는다. 그냥 아이들과 얘기하다가 찍을 뿐이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사진이 일상보다는 조금 특별한 일에 가까웠던 그 시절.

사진이 찍히는 순간에 나는

무언가 최선의 포즈를 취해주지 않으면 안되는 약간의 강박을 느끼곤 했다.



눈 감으면 안 돼.

시선이 다른데를 향해도 안 돼.

아.. 얼굴이 가렵네. 그래도 긁으면 안 돼.

이런, 옷이랑 머리랑 제대로 되어 있는지 확인도 못했네.

연습했던 표정 제대로 하고 있는건가?

왜 이렇게 안찍는 거야. 얼굴 쥐나겠네.

지난번처럼 그 어색한 웃음 나오면 큰일인데, 표정을 바꿔볼까? 

아냐 그냥 하던 대로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

.

.


그런 복잡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찍힌 사진은

그저 추억의 증거가 될 뿐, 

내 인생의 일부라며 누군가에게 내보이기엔 뭔가 부족하다.






내가 사진을 찍을 때 하나 둘 셋을 말하기 싫은 이유는


내가 그래왔듯이 그런 강박으로 사진을 낭비하기 싫어서이기도 하고

로즈와 가브리엘처럼 사진이 일상의 일부가 된 요즘 세대들에겐 의미가 없기도 하거니와

최소한 일반인에게는 임의로 포즈를 잡은 모습보다

일상에서의 모습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진짜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사인으로서 하나 둘 셋을 말할 필요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지극히 일반적으로 "하나 둘 셋"을 외친 사진이다.


어느정도 사회화가 된 어른들은 적당히 좋은 포즈 또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단체사진"이라는 틀에 묶여 뚱하다.







이 사진은 "하나 둘 셋"을 외치기 전 한가지를 주문했다.


"최고 웃긴 표정, 최고 못생긴 표정을 만들어 보세요!" 였다.


성격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한 마디로 아이들다워졌다.




내가 원하는 사진은 이 쪽이다.

똑같이 기념사진을 남기더라도, 

이날 이러이러 행사를 한 것이 기념이 아니라,


내가 이 때 얼마나 신났는지,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기념하는 것이 바로


기념(記念) 사진이다.








완성한 작품보다, 이걸 만들기 위해 집중을 하던 그 순간이 소중한 것이다.


"하나 둘 셋"이 어떤 의미에선 무의미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물을 촬영할 때


"하나 둘 셋"을 말하기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