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ER
시카고 쿡카운티 제네럴 메모리얼 이라는 가상의 병원 응급실(ER)과 응급실 입구를 마주한 식당 닥 마구(Doc Magoo)를 배경으로 하며 그 안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응급실을 오가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미국의 의료환경은 물론 사회상이 매 에피소드마다 적나라하게 드러남으로써 미국 메디컬 드라마의 수준을 전 세계적으로 끌어올려 Amy상 최우수 드라마 부문 등 각종 상을 휩쓸기도 했고 방송기간동안 동시간대 시청률 부동의 1위를 고수하였다.
국내에서도 오랜기간 매니아층을 형성하여 팬 카페는 물론 팬사이트가 존재하기도 하였고 다양한 의학적 케이스와 처치 장면이 매우 현실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한때는 국내 의대생들이 공부를 위해 챙겨보거나 아얘 자막제작에 참여할 만큼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한국 내에도 방영된 적이 있었는데 한류 드라마의 강세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편성이나 편집, 내용 도용 등 매니아층은 물론 당시 한창 미국 드라마에 관심을 갖게 된 새로운 시청자들에게조차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 벌어지면서 결국 저조한 시청률을 면하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시즌 15까지 방영되는 기염을 토하다가 제작자 마이클 크라이튼의 사망 다음해까지 방영 후 종영되었다.
■ 리뷰
시카고 태생으로 하버드 의대를 졸업한 과학소설가이자 영화/드라마 제작자인 마이클 크라이튼(Michael Crichton, 1942~2008)은 자신의 출신환경을 토대로 드라마를 제작하였기 때문인지, 매우 현실적이고도 드라마의 요소들이 잘 어우러지도록 구성된 작품을 내놓았다. 가상의 쿡 카운티 병원 응급실을 통해 가장 사람의 원초적인 희로애락은 물론, 미국 사회의 일면, 그리고 의료시술에 대한 세심한 디테일 등이 적절히 조화되어 메디컬 드라마에 있어서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탁월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1. 희로애락
새벽 5시. 야간 근무 중 지쳐 잠이 든 닥터 그린을 간호사가 깨운다. 더 자고 싶은 닥터 드린은 인턴이 환자를 보게 하라고 지시하지만 오프중이던 단짝친구 닥터 로스가 술에 취해 응급실에 왔다는 말을 듣고 피곤한 몸을 비틀거리며 로비로 나간다. 닥터 로스가 취중에 응급실에 오는 일은 다반사였으므로 닥터 그린은 별 감흥 없이 능숙하게 수액을 달아준다. (시즌1 에피소드1 첫 장면)
등장인물(특히 주인공들)을 묘사하는 첫 씬에서 크라이튼은 드라마의 첫인상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ER의 시리즈들을 통틀어, 모든 등장인물들은 박봉에 폭풍 같은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실을 견디며 지내는 것으로 묘사했는데 일단 응급실은 쾌적하고 적당히 시간을 때울만한 직장이 아니며 “절대적으로 피곤한 곳”이라는 느낌으로 시작한 것이다.
ER(응급실)이라는 특성상, 끈끈한 동료애와 팀워크가 중요한 폐쇄공간이라는 특성이 더해져 더 적나라한 인물 묘사가 이뤄졌다. 등장인물들도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도 하고 동료와 부딪히기도 하며 더 단단한 자신을 만들어가는 고민의 과정을 거치는 에피소드들이 전개된다. 등장인물들의 개인사가 조금씩 얽혀 있는데, 이혼, 자살시도, 혼전출산, 연애, 가족관계, 진로문제 등이 응급실 관련 에피소드들과 맞물려 돌아가며 유기적으로 스토리가 형성되는 탄탄함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환자가 병력이나 증상을 호소하면서 자연스럽게 털어놓는 환자들의 개인사 또한 시청자들로 하여금 감동하거나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분노하게 하는 감정적 요소를 충분히 갖고 있으며 이 이면엔 미국사회의 현실이라는 다른 재미 요소가 숨어 있다.
2. 미국사회
등장인물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응급실에 내원하는 환자들을 통해 비춰지는 다양한 미국 사회의 모습은, 비단 미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인종문제, 에이즈 환자의 직업활동, 아동/노인 학대, 극빈자문제, 이혼가정 등의 각종 사회문제가 환자들의 희로애락을 매개로 미국 사회가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의학적 사례와 얽히면서 등장인물들(의사, 간호사)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히포크라테스 정신을 지키기 위해 사회적 규율을 벗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기도 하는데(특히 닥터 로스, 닥터 카터), 이러한 면면은 다시 등장인물들의 희로애락으로 귀결되면서 유기적 스토리 전개가 가능해진다.
3. 의학적 묘사
메디컬 드라마의 매력이자 자충수가 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의학적 묘사인데, ER은 매 에피소드마다 응급환자들에 대한 다양한 의학적 사례가 아주 꼼꼼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대사에 등장하고 물 흐르듯 진행된다. 시급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에선 처치를 위한 대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전문용어가 줄줄이 나오기 때문에 자칫 준비를 소홀히 하게 되면 시청자의 몰입을 책임져야 하는 그 중요한 순간에 배우의 어색한 말투 한마디로 집중력이 깨질 수도 있는 것이다. 15시즌에 걸쳐서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을 보면 매우 치밀한 기획이 뒷받침 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의료시스템 체계에 대한 묘사도 아주 적나라하면서 허를 찌르는 부분이 많다. 제도적 맹점이나 어떠한 제도로 인해 소외 받는 계층을 부각한 적도 있으며 어떨 땐 그러한 시스템의 특성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앞길(?)을 막기도 하고 인물들간의 대립도 일으키지만 그런 점 마저도 인물들의 됨됨이를 보여주고 앞으로의 스토리를 예상해보는 재밋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 총평
의학 드라마답게 의학적 내용에 충실하여 의대생들이 챙겨볼 만큼 의학적 내용과 재미를 골고루 갖춘 드라마가 또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 정도로 다양한 의학적 사례와 다양한 환자들을 만나면서도 그 스토리들이 꼬이지 않고 잘 정돈되어 시청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점이 대단하다.
다만 20년이라는 시간의 갭이 있음에도 아직 한국 사회가 받아들이기 힘든 “다분히 미국적”인 부분들이 보여지기 때문에 다소 자극적이기도 하거니와, 일부 미국적 유머를 이해할 수 없어서 웃긴 장면이 그냥 덤덤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결국 인생의 희로애락에 따라가다 보면 유머보다는 무거운 주제 중심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맹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팬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다시 방영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한국 내에서는 가위질과 심야편성 등을 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팬으로서 다소 씁쓸한 기분이 떨쳐지지 않는다.